Giovanni Ozzola
April 8 – May 8, 2021
“His canvases are like my films: they speak of nothingness with accuracy,” wrote the great Michelangelo Antonioni, in an extraordinary correspondence with Mark Rothko. And how do you blame him? It is easy to look at one of Antonioni’s masterpieces randomly from start to finish, and you find yourself at the closing credits wondering, “ok, but when does the film start?” This is because he managed to get rid of the fetish of narration, just like Rothko in his paintings.
Well, Giovanni Ozzola’s attitude is in that matrix. This series of works by him (but I would dare to say all his works) do not have the ambition of the story, but are a single sequence shot that speaks to us of a very precise moment, of a portion of the present. And if it is true that his research walks on the legs of simplification, it is equally true that his need is to find a theatrical lexicon, which reveals his surprising path only when the adventure is complete and which allows him to abandon the world and enter the work. The images it offers us are not a simple representation, they are a flow of living matter that is our accomplice. In fact, the human presence is never there, because it is the viewer himself who represents it and completes the work.
In the relay race, the athletes play in a team and compete one at a time in succession, but there is a moment in these races that has a eurythmic, orchestral flavor: the passing of the baton. That moment, which lasts a few moments and is almost imperceptible, is always seen in Ozzola’s photographs: all the sense of that split second. The work is not a simple two-dimensional surface hanging on a wall, but it is an entity that awaits us, that winks and is ready to officiate the harmonic rite, to complete and complete us. And it is not easy to evoke the human presence without falling into the trap of showing it, because at that point the story would be defined and we could not build ours: this is the peculiarity of great artists, who in a certain sense abdicate the role of presenting a complete work, because in the finite the possibility of infinity disappears, which is much more intriguing.
This is why Ozzola uses urban scars, places with such strong symbolism that they become archetypal, to offer us an opening to other worlds. And be careful though, because there is no talk of escapism: those distant horizons, whether evoked or explicit, are not enough in themselves and need those human archaeologies such as those abandoned concrete huts, the interiors of anonymous apartments or the streets of broken asphalt. They complement each other and give a sense of symmetry to us who look, because in those walls we can protect ourselves, in that light we can instead navigate. And all those closed environments that offer a distant perspective allow us to live an exclusive experience of solitude, which is a word as complex as it is open to the most diverse interpretations. We are alone in front of Ozzola’s works and it is up to each of us to decide whether he is a healthy voluntary hermitage or an annoying abandonment. What then is wrong to say that we are “in front” of the work, and perhaps it is not even correct to say that we are “ins
ide” it: we are the work. Those structures are our skull and the perspectives our gaze.
The environments of Ozzola penetrate the world and trace a division, a passage, a border area that is entirely internal to ourselves. Jung said that as far as we can discern, the only purpose of human existence is to turn on a light in the darkness of mere being and then in front of these photographs we certainly grasp the sense of the signs that the human being has traced, as a primordial desire to remain, to leave something, but also a sort of aesthetic short-circuit where there is no longer any distinction between nature and artifice. Ozzola tells us that these are categories of the mind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the absolute and therefore invites us to free ourselves from the ghetto of knowledge, to transport us into its allegory, in a perspective that narrates the ephemeral value of beauty and places the artist almost in the compulsion to testify that moment. And there is an almost fable-like character in these works, especially in those of the flowers: Giovanni told me that he had lived a very long spring for a period, because in a long pilgrimage between the Canary Islands, China, Cuba and other places he was to experience a sort of memento mori, where the maximum of beauty was expressed and therefore the urgency was dictated by immanent transience. And then those petals, which once again are not in contrast with the asphalt, but become color on the canvas that these destroyed streets represent, offer Ozzola the opportunity to see and witness that dazzling moment that precedes the great explosions, that beauty that takes your breath away and makes us forget that everything is about to end.
It is the refusal of the future, as if chasing an eternal present, where those petals are the hypnotic trace and sound of the Pied Piper. And in these interior projections Ozzola makes us lose, we are no longer human beings, but the substance and essence of a scratch, of a groove made of immateriality, of a precarious sign that does not age, but warms. And then, in the will to live those works as our monopoly, to feel those environments that are ours and ours alone, Ozzola will succeed in the magic of unveiling by hiding, confusing us and making us indefinable even for ourselves, without selfishness and boundaries.
“그의 캔버스는 나의 영화와 같아요: 정확히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대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은 마크 로스코와의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안토니오니의 걸작 중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는, 엔딩 크레딧에서 “음, 근데 영화는 언제 시작하는 거지?”라고 물어보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그의 영화들이 (로스코의 작품들처럼) 나레이션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기에 그렇다.
Giovanni Ozzola의 애티튜드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의 이번 시리즈(사실 그의 모든 작업들이라고 해도 되겠다)에는 야망에 찬 스토리가 없다. 오히려 현재의 일부인 어떤 짧은 순간에 대해 말하는 싱글 시퀀스 샷이다. 그리고 만약 그의 탐험이 단순함이라는 장치 위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의 목적은 극적인 어휘를 찾는데에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극적인 요소는 그가 모험을 끝낸 후에야 여로를 드러내고, 세상을 뒤로 한 채 작품 속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가 제시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며 우리와 동행하는 생명체들의 흐름이다. 사실 인간의 존재는 그곳에 없다. 작품을 보는 우리가 인간의 존재를 대표하며 작품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릴레이 경기 때 운동선수들은 팀에서 한명씩 번갈아가며 경기를 펼친다. 이 안에 리드미컬하고 협연과 같은 묘미가 있는데, 바로 바톤을 주고 받는 순간들이다.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이 몇 초 동안, 그 찰나의 모든 감정들이 Ozzola의 사진에는 늘 담겨있다. 그의 사진 작품들은 단순히 벽에 걸린 이차원 평면이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에게 손짓하며 우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조화로운 의식을 시작하려는 주체들이다. 작품 속에서 인간의 형체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존재를 상기시키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에는 제약이 생겨버리고 우리 각자의 스토리를 쓸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대가들의 특징이기도 한데, 제한된 공간 내에서는 무한에 대한 가능성이 사라져버리기에 작품을 완성시키지 않은 채 손을 떼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Ozzola가 우리에게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를 제시하기 위해 상징성이 강한 도심의 상처들을 차용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에 현실 도피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간에 관계없이, 그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콘크리트 건축물, 이름 모를 아파트의 내부, 혹은 망가진 아스팔트 길과 같은 인간 문명의 흔적이 필요하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대칭적인 느낌을 주어, 관람하는 사람에게 보호막 역할을 해주는 벽들과 달리, 항해를 위한 빛을 제공한다. 이렇게 폐쇄된 공간은 멀리서 풍경을 보는 듯한 시각을 가능케 하며,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철저한 고독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는 Ozzola의 작품 앞에서 혼자이고, 그것이 자발적이고 즐거운 은둔인지 혹은 버려진 느낌일지를 정하는 것도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작품 “앞에” 있다고 하는게 맞지 않는 표현일수도 있고, “안에” 있다고 하는 것도 틀린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작품 그 자체가 된다. 작품 속 건축물들은 우리의 신체이며 사진 속 관점은 우리의 시각이다.
Ozzola가 제공하는 환경은 세상을 관통하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분열, 통로, 경계선을 추적한다. 칼 융은 우리가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한,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단순한 실재로써만 존재하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다. Ozzola의 사진 작품 앞에서 우린 생존에 대한 갈망,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인류의 흔적들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자연과 문명의 경계가 흐릿해진 미적 접촉점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이것이 절대성과 무관한 마음 속 영역이라고 말하며 우릴 지식의 웅덩이 속에서 해방시키고 작품의 알레고리 속으로 초대한다. 그는 이것을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아름다움 및 장소들에 대해 마치 충동적으로 증명하려는 듯 이야기한다. 이 작품들에는(특히 꽃을 담은 사진들) 우화적인 요소가 있다. Giovanni는 예전에 자신이 카나리 군도, 중국, 쿠바 등을 순례하며 memento mori를 경험하고, 미의 극치를 느끼며 아주 긴 봄을 지낸적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 있는 이 꽃잎들은 아스팔트와 대조를 이루는 존재들이 아니라, 망가진 길거리가 상징하는 캔버스 위의 물감으로 작용한다. 이 둘은 작가가 대단한 폭발에 앞서 눈부신 순간들을 실제로 목격하고 이 아름다움이 언젠가는 곧 끝난다는 것조차 잊도록 해준다.
이는 곧 미래에 대한 부정이며, 꽃잎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최면 걸린 흔적과 소리를 따르듯 영원한 현재를 추구한다. 이러한 내적 투영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 어떤 상처의 일부인 동시에 본질이며, 비물질성의 파동이고, 노화하지 않고 점점 익어가는 위태로운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이 작품들을 우리만의 전유물로 남기고싶은 욕망 속에서, 작가는 이기심이나 경계 없이 우리를 숨기고 혼란스럽게 하고 정의할 수 없도록 만드는데 성공할 것이다.
3.29.2021
니콜라스 발라리오(Nicolas Ballario)
Evening in Milan, 2020, Giclée print on cotton paper, dibond, frame, 103 x 77 cm